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피의 일요일 사건 (문단 편집) == 차르 체제의 일면 == [[러시아 제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시민의식의 발달이 뒤떨어졌고 사건이 벌어진 당시까지도 [[왕권신수설|"황제는 하느님의 대리자"라는 관념]]이 뿌리깊게 박혀 있었다. 가폰 신부의 행진도 황제에게 직접 탄원하면 "자비로우신 황제가 민중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따뜻하게 안아주실 것이다." 라는 순진한 기대감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하느님과 같이 섬겨 오던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비무장 시위대를 상대로 무차별 사살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러시아 민중은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으며 차르 숭배 관념은 단숨에 무너졌다. 당시 동쪽 변방에서 [[일본 제국]]과 [[러일전쟁|전쟁하던]] 러시아 정부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위기를 맞이한 셈이 되었다. 사실 [[쓰시마 해전]] 등의 압승과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당시 일본은 국력의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고 화력의 열세를 군인들의 목숨으로 지불하던 상황 때문에 일본보다 훨씬 강대국이었던 러시아가 전쟁을 좀 더 끌었다면 일본도 무너질 가능성이 높았다. 러시아 내부에서 터진 이 사건으로 러시아는 여유가 없어지고 서둘러서 전쟁을 끝내게 된 것이다. 1906년 포츠머스 회의에 전권대사로 파견되기도 했던 [[세르게이 비테]]는 [[헌법]]제정과 의회인 [[두마]]를 구성하겠다는 약속으로 성난 국민을 설득하여 가까스로 난국을 진정시켰으나 그 정도로는 하늘이 부여한 것으로 여겨졌던 제국 정부의 도덕적 정통성이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참고로 이것도 일본보다 한참이나 늦었다. 일본은 이미 1889년 근대적 [[대일본제국 헌법|헌법]]과 [[일본 국회|의회]]제도를 시작했다. 심지어 일본의 개항이 1854년에, [[메이지 유신]]은 1868년에 시작되었음을 감안하면 러시아가 얼마나 뒤떨어졌는지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헌법만 따지자면 [[대한제국]]의 [[대한국 국제]]라든가 [[홍범 14조]]보다도 늦다. 하지만 그보다 헌법을 더 빨리 제정했던 폴란드는 결국 러시아에게 분할당했다.] 결국 [[로마노프 가문|로마노프 왕조]]의 붕괴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한편 한국 역시 이 사건의 여파가 겹쳐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빠르게 항복해 버리면서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일거에 무너지고 일본이 주도권을 쥐면서 [[을사조약]]으로 이어져 5년 후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지는 흐름의 발단이 되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관련이 있는 사건이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인해 러시아, 일본, 한국, 더 나아가서는 세계와 역사의 운명이 흔들린 것이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일본과 러시아에 압사당하는 한국.jpg|width=100%]]}}} ||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러일전쟁]]으로 [[러시아 제국]]이 [[일본 제국]]에게 두들겨 맞는 것을 그린 정치풍자 그림엽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때리는 작은 [[망치]]인 [[메이지 덴노]]와 멍한 표정으로 맞는 커다란 [[모루]]인 [[니콜라이 2세]], 그리고 너덜너덜해진 옷차림으로 중간에 끼여 고통받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이 그려져 있다.]}}} || 결국 이 사건은 훗날 [[러시아 혁명]]의 발단 중 하나가 되어 '러시아 1차 혁명' 또는 '1905년 혁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마침 이 사건이 일어난 1905년은 러시아 혁명의 시초로 평가받는 [[포템킨 반란 사건]]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혁명]] 이후 가족들과 함께 혁명군에게 처형당했다.[* 니콜라이 2세 부부와는 다르게 자녀들은 정치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고 나이도 어렸기 때문에 세간의 많은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본래 혁명 당시 황실 일가는 영국으로 망명하고자 하였고 실제로 영국의 [[조지 5세]]가 니콜라이 2세의 사촌이였기 때문에 망명을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인해 영국 시민들에게도 니콜라이 2세는 자국민을 학살한 폭군으로 각인되어 있었으며 섣불리 망명을 받아들였다가 이후 반 국왕 감정이 강해지면 영국 왕실의 안위도 위험했기 때문에 영국도 황실 일가의 망명을 받아들이기를 포기했다. 물론 영국의 계산 속에서 '니콜라이 2세'와 황가는 시민 '니콜라이 로마노프 씨'와 그의 가족들로 지위를 모두 박탈당할 줄만 알았지, '''황실 일가가 총 맞고 죽을 줄은 전혀 몰랐지만 말이다.''' 니콜라이 2세 가족의 몰살 소식을 들은 [[조지 5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그리스 왕실이 몰락하고 왕족들에게 추방령이 내려지자 조지 5세는 니콜라이 2세 때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지체없이 그리스 왕족들을 받아들였다. 이때 받아들인 왕족들 중에는 장래 [[필립 마운트배튼|손녀사위]]가 되는 왕자가 있었으니... ][* 사실 혁명의 당위성을 위해선 소련에게 있어 실패한 아버지인 니콜라이 2세는 귀족들과 함께 죽어 마땅했고 만약 총살당하지 않았어도 이후 혁명정부가 재판에서 차르에게 사형이나 추방 등의 형벌을 내렸을 것은 당연했다. 그의 가족까지 죽인 것은 볼셰비키들의 입장에서도 야만적인 행위였으나 당시 명령 체계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백군이 예카테린부르크 코 앞까지 도착했단 소식을 듣자 이에 당시 적군 지휘관들은 겁을 먹고 니콜라이 2세는 물론이고 후환이 될 수 있는 황후와 공주들, 황태자와 목격자들인 하인들까지 모조리 죽여 버리는 것으로 결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